샤를 주르당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1919년 프랑스 로망쉬르이제르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신발 회사를 설립했다. 1921년까지 그는 볼테르 대로에 30명 이상을 고용한 공장을 열었다. 1930년대에 주르당은 관례를 깨고 고급 패션 잡지에 광고를 낸 최초의 신발 디자이너가 되어 자신의 브랜드를 신발 분야의 오트 쿠튀르 하우스로 자리매김했다.

브랜드의 아들들은 1947년에 합류해 국제적 확장을 이끌었다. 1950년 영국, 1957년 파리 부티크, 그리고 크리스티앙 디올과 피에르 카르댕을 위한 신발 디자인 라이선스가 그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샤를 주르당은 혁신적인 소재와 사진작가 기 부르댕의 초현실주의 광고로 유명한, 프랑스 럭셔리 신발 브랜드의 대명사였다. 1975년 브랜드는 기성복 의류와 핸드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99년 회사는 플래그십 매장을 파리의 샹젤리제로 옮겼다. 엄청난 임대료가 따르는 명망 있는 입지였다. 동시에 경영진은 디자인에서 소매업으로 초점을 옮기면서 브랜드를 규정했던 창의적 우위를 잃었다. 샹젤리제 매장은 2년이 채 안 되어 문을 닫았다. 2002년 중반, 샤를 주르당은 그해 6만 5천 켤레의 신발만을 판매한 채 900만 달러가 넘는 부채로 파산을 신청했다. 주르당 가문은 지분을 룩셈부르크 투자 펀드 럭스 다이버시티에 매각했고, 브랜드는 재편되었다.

1999년 샹젤리제 이전과 소매업 집중은 900만 달러의 부채와 가문의 경영권 상실을 초래했으며, 판매량은 6만 5천 켤레로 떨어졌다.

1999년 샹젤리제로의 이전은 역효과를 냈다. 임대료가 판매되는 모든 켤레의 마진을 잠식했고, 상징적인 주소만으로는 비용을 충당할 만큼 충분한 유동 인구를 끌어들이지 못했다.

경영진은 디자인에서 소매업으로 초점을 옮기면서 샤를 주르당을 디올의 선택으로 만든 창의적 정체성을 잃었다. 디자인의 우위가 없으면 고객이 프리미엄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판매량은 연간 6만 5천 켤레로 떨어졌다. 한때 크리스티앙 디올을 위해 디자인했던 브랜드에게 이 판매량은 900만 달러의 부채 앞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명망 있는 주소가 잘못된 전략을 고치지는 못한다. 샤를 주르당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로로 옮겼지만 디자인의 정체성을 잃었고, 그 입지는 부채가 되었다.

샤를 주르당은 파산 후 럭스 다이버시티에 인수되었고, 패트릭 콕스를 수석 디자이너로 하여 재편되었다(2003-2005). 브랜드는 축소된 형태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프랑스의 대표적인 럭셔리 신발 하우스로서의 지위를 결코 되찾지 못했다. 디올을 위해 디자인하고 기 부르댕과 함께 광고했던 이 회사는 자신이 무엇보다 디자인 하우스라는 사실을 잊은 디자인 하우스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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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Charles Jourdan — Wikipedia en.wikipedia.org
  2. BBC News news.bbc.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