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력 파이프라인을 스스로 선택한 내부 집단으로 제한하는 모든 조직은 같은 시계를 돌리고 있다. 배제된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경쟁자를 만든다. 천장은 결국 깨질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내부에서 깨지느냐 외부에서 깨지느냐이다.

신라는 서기 668년 한반도를 통일하고 골품제(骨品制)를 통해 통치했다. 이는 모든 사람의 한계를 결정하는 세습적 위계였다. 왕위는 '성골(聖骨)' 등급에 속했고, 그 혈통이 654년에 끊기자 '진골(眞骨)'이 계승했다. 그 아래의 6두품, 5두품, 4두품은 하급 관직은 맡을 수 있었지만 최고 사령부나 왕위에는 결코 오를 수 없었다. 이 제도가 곧 헌법이었다.

두 세기 동안 이 체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배제는 전면적인 것이 되었다. 뛰어난 군사 지휘관과 지방 관리들 중 낮은 골품 출신은 능력과 무관하게 승진할 수 없었다. 중앙의 진골 귀족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더 작아지고 더 폐쇄적으로 변했으며, 배제된 주변부는 더 유능해지고 더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892년, 비엘리트 출신의 군사 지휘관 견훤이 남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를 세웠다. 901년, 혈통에 논란이 있는 승려 궁예가 북부를 장악하고 태봉(후고구려)을 세웠다. 230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했던 통일 신라는 이제 남동부만을 통제했다. 골품제는 이들을 편입시킬 어떤 장치도 없었다. 오직 배제할 수 있을 뿐이었고, 배제야말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였다.

935년, 마지막 신라 왕은 태봉의 후계 국가인 고려에 항복했다. 영원히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계승 체계를 설계했던 왕조는 통일 후 280년을 버텼지만, 마지막 한 세기는 승진시키기를 거부했던 인물들이 경쟁 왕국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잔존 국가로 보냈다.

골품제는 권력을 축소되는 엘리트 집단에 유지시켰다. 유능한 외부인을 배제하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쟁 왕국을 세웠고, 이로써 신라의 통치는 280년 만에 끝났다.

골품제는 통일 이전의 왕위 계승 전쟁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그러나 통치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누가 통치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했다.

진골 배타주의의 각 세대는 적격자 풀을 축소시켰고, 따라서 제도의 안정성은 점점 작아지는 계급에 의존했으며, 배제된 계급은 점점 커지고 더 유능해졌다.

제도에는 압력 배출 밸브가 없었다. 승진 경로도, 공동 선택 메커니즘도, 유능한 외부인을 내부로 끌어들일 방법도 없었다. 배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반란이었다.

신라의 왕들은 반란이 없다는 것을 제도의 정당성으로 착각했다. 200년간의 순응은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조직화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증거였다.

권력을 축소되는 집단 내부에 유지하는 규칙은 그 집단이 통치하기에 너무 작아질 때까지 안정적이다. 제도는 공격을 받아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공격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실패했다.

고려(918–1392)는 골품제를 과거 시험 제도로 대체했으며, 이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설계되었다. 골품제는 한국 역사학에서 통일 신라 분열의 구조적 원인으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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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三國史記》— 한국어 위키문헌 ko.wikisource.org
  2. World History Encyclopedia — 'Bone Rank System' (Silla golpum; sacred bone, true bone, head ranks; offices restricted by birth; rigidity cited as factor in Silla's downfall) worldhistory.org